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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신학 2금지된 땅에도 봄은 오는가 8
조대영 칼럼리스트 | 승인2016.05.04 15:52

(3) 교회는 봉사(diakonia)다.
교회는 봉사가 전부인 것같이 보인다.

‘디아코니아(봉사)’는 본래 식탁에서 급사로 수종드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눅 17:7-10). 이 소박하게 수종드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공동체 내의 정신과 관계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말로 만드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인격과 실천을 통해 인간관계의 세계 속으로 도입한 가치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가 봉사의 원칙 아래 놓여 있는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전서에서도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의 근본 법칙으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diakonia)하라”(벧전 4:10).

초대교회에서는 기독교의 공동체 형성에 공헌하는 모든 활동과 기능을 봉사의 규범 밑에 다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봉사자들이며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역자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특히 중요한 구절은 에베소서 4장 11-12절 말씀이다. 여기에는 교회의 일체성과 전체성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중에서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하다. 종래의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라고 하여, ‘온전케 하며’와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로 나누어서 두 문장으로 해석했다. 그 이유는 원래 봉사(diakonia)로 되어 있는 것을 봉사가 아닌 사역(ministry)으로 해석해 이것을 실행하는 목회자(minister)를 특수 기능을 가진 ‘목사직’에 속한 특수한 계층의 사람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목사’라는 말이 없으나, 에베소서 4:11절에서 ‘목자’로 되어 있는 것을 ‘목사’로 번역한 것도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이 잘못을 시정해서 ‘하며’를 ‘하여’로,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해석함으로써 특수직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여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사실 에베소서를 쓸 당시에는 목회자가 없었으므로 모두 평신도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평신도로 구성되었으며 나중에 목회자가 평신도를 돕는 부수적인 존재로 나타난 것이다.

열 두 제자들도 스승인 주님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것은 사도직을 봉사자의 범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행 1:17).

즉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에서 ‘직무’는 헬라어 원문에는 ‘봉사(diakonia)’로 되어 있는 것을 ‘직무’로 번역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4~30절을 보더라도 바울이 ‘모든 역사’에 관하여 말함에 있어서 영적인 능력과 은사의 표현을 ‘여러 가지 봉사(diakonia)’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 바울 자신과 그의 동료들의 사역은 ‘화해의 직무’이며, 그들은 새로운 언약의 ‘디아코노이(종들)’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종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으며, 그가 세운 교회에서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오늘날의 목사의 위치에 있던 바울은 여기서 참된 ‘주인’은 누구시며, 또 자기는 단순히 그의 ‘종’ 또는 ‘노예’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회심하게 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독립된 인격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이 공통적인 주님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는 표현은 ‘봉사’의 의미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다루면서 항상 주장하는 것은 모든 교인들이 어떠한 은사를 받았든지 간에 그것은 모든 회원들이 서로 돌보게 하기 위하여 ‘공동 유익’을 위해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처럼 근본적으로 ‘봉사’의 개념에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 구조가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인 ‘봉사적’이 되는 대신에 권위와 권력의 분열로 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봉사적 직무(diakonia)'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봉사적 직무라는 근본 사실을 충분히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는 고기를 잡으러 산으로 가는 집단이 될 것이다.

목사의 직무와 평신도의 직무는 각기 그 분야와 소명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은 같은 ’봉사‘의 두 면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의 교회론도 봉사적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그 유명한 ‘세 가지 직무’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며, 교회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인 기능들은 이 그리스도의 직무를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교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대한 그의 봉사의 표현에 대한 여러 차원의 포괄적인 기능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특히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이 세 가지 칭호,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을 지나치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을 높여야만 목회적 직임(목사와 신학자들)을 가진 자들의 신분이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안에서 자기를 선지자의 완성자로서 말하고 있으나, 자기 자신을 선지자라는 암시로만 표현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다”는 식으로 조금은 거만한 투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가 참된 대제사장임에는 틀림없으나 자기가 제사장이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를 희생제물 그 자체라고 말하며, 또한 희생되기를 원함으로써 세상의 죄를 지는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자로 생각하셨지, 대제사장이 되어 지배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셨다. 또한 자기의 왕권을 지적(마 27:11)하기도 하셨으나 그를 대표하는 말은 ‘고난의 종’이었다.

즉 그의 교회론은 구약에 나타난 세 가지 직임을 다 하시면서도 실제로 행동은 ‘고난의 종’이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목회적 직임을 맡은 사람들이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 것인가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이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대단한 구약의 세 가지 직무, 즉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대단한 신분이 아니라 디아코노스(종)라는 사실에 근본적인 의미를 두셨다는 것을 우리들, 특히 목회자들은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봉사’라는 관점에서만 옳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목회자들만 모른다는 말인가?

마태복음 20장 25-28절에서 이 법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doulos)이 되어야 하리라.”

이러한 명령법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28절에 있다. 곧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디아코노스[종]가 되려고) 함이라.” 이 법칙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의미를 반영하고 있으며, 대단히 중요한 것은 교회라는 새로운 차원과 세상이라는 옛 차원과의 참된 거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법칙이다.

“그러나 너희들 가운데서 그리 해서는 안 된다”,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욕망은 봉사에 대한 욕구로 대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는 말을 들은 목사나 장로는 “나도 섬기는 자로 당신들 중에 있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아닌가?

빌립보서 2장 7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심을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종이 되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겸허의 정신을 바울은 특징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절) 


조대영 칼럼리스트  dycho11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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