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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신학을 위한 준비금지된 땅에도 봄은 오는가 6
조대영 칼럼리스트 | 승인2016.03.17 16:44

현재 평신도가 평신도 신학에 대해 무지(無知)한 상태라면, 평신도 신학을 구축하고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이해조차 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를 본질적으로 개혁하려 한다면, 아마도 16세기 종교개혁 이상으로 철저한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종교개혁은 이뤄졌지만 교회의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실 영적으로 죽어있던 중세교회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개신교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물고기가 물 밖에 나와 새 삶을 개척해야 했던 것처럼 부활의 생명을 창조할 수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중세교회의 환경 속에서 안일하게 살아남으려고 한 것과 같은 것이 개신교의 교회 환경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신앙적으로 평신도 신학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대단한 각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크래머는 교회의 개혁은 교역자(신학자나 목사)로서는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에 평신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평신도가 무슨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잃어버린 이 세상 안에 있는 부족한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교회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평신도 주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은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박은 실재라는 사실이 평신도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보이도록 나타나야만하기 때문이다.

교회나 선교기관이 마치 신성불가침인 것과 같은 역사적인 제도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배나 설교, 교육이나 목회와 같은 교회의 모든 활동이 마땅히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인격자가 되도록(엡 4:13) 그들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목회자가 도둑심보를 가지고 있다면 교인들을 하나님의 인격자로 만드는 일에는 전혀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사랑의교회를 위시한 한국교회의 철저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며 철저한 평신도의 주체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보다도 21세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평신도가 교회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신경은 하나의 교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이것은 교회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세례식의 선서로 훌륭하게 사용됐다. 그 교회란 교회와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생명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사람들의 사귐의 단체로서의 교회였다.

그들은 교회를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혹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추방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보다 더 두려워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교회에서의 추방은 곧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본래 사령관에 대한 병졸들의 충성 서약을 의미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군대에 들어감으로써 지금까지 속해 있던 옛 세상, 곧 거짓과 죽음의 세계를 떠나 전혀 다른 생활의 법칙을 가진 교회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다는 사실의 선언을 의미하는 것이며, 소망의 천국 생활에 들어가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며, 이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평신도 신학의 입문과 같은 것이다.

주기도문도 교회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기도문이 주로 예배 의식에 사용되는 기도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이 이제는 거의 말살되어 버렸다. 주기도문이 놀라운 것은 그 단순성과 깊이와 그리고 직접성이 함께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등의 연관성이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가족을 찾으러 오신 것이다. 교회는 곧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마다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요 어머니니라”(막 3:31-35)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은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에서 절정에 이른다. 교회의 이와 같은 가족적 성격은 이것이 보여 주는 생활의 질과 마음가짐에 있어서 영향과 변화를 가져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 공동체나 교회론은 이러한 교회의 범주에 대하여는 전혀 용납할 여지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가정 교회’같은 의식적으로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형태를 따라 구성된 교회 운동과 같은 것이 미국과 한국 등에서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에 대한 건전한 개념과 건전한 태도를 갖기 위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강조한 것처럼 공동체적인 책임을 모두가 마음에 잘 간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의 멤버가 된다는 것은 첫째, 교회 또는 가정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우주의 참된 창조적, 지배적 실재와 힘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일이다.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은 제1세기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동시에 생명을 걸고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그와 같이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교회의 참된 특성과 그 소명을 거침없이 표현하기 위해서는 평신도가 교회에서 참된 주체자라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평신도 신학이 참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교회의 사명 속에서 평신도의 근본적인 위치와 책임 있는 부분으로 인정하는 그러한 교회의 견해와 활동의 정상적인 한 부분이 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은 교회를 낳았다. 교회는 하나의 제도로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신앙공동체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잃어버린 초창기의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평신도 신학의 시작이 될 것이며 교회개혁의 주춧돌을 놓는 것이 될 것이다.

故옥한흠 목사는 그의 유명한 교회론 강의에서 “교회는 시대마다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① 주후 3~4세기까지 초대교회는 순교를 하고 생명을 걸고 끝까지 싸우는 전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②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나 다름없는 좋은 대우를 받는 전성시대가 도래하자 교회는 세상과 화해하는 화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③ 교회가 화해의 이미지를 오래 유지하다보니 세상에 동화된 동화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이고 교회가 세상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동화되어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④ 종교개혁 때에는 교회가 참교회를 찾다보니 순결을 부르짖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하는 분리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⑤ 오늘날 20세기, 21세기는 어떤 이미지가 요청되는 시대인가? 통계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 같이 보여도 실상은 교회 문화가 세상문화에 압도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의 상황과 같은 전투적인 이미지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세시대처럼 분리의 이미지로서의 교회론을 그대로 가지고 지금 목회를 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순결만을 강조하여 거룩한 삶, 교회생활에 열심인 삶, 세상과 짝하면 안 되는 삶, 중보기도 열심히 하는 삶, 교인들끼리 사랑하고 교제하는 삶 등 교인의 특권의식을 자극하면서 사회와 분리된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보호목회를 하다 보니, 교회 성격은 자연히 내향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왜 세상에 있는가?’라는 소명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죽지 못해 있는 것이다’ 또는 ‘죽을 때가지 기다리는 곳이 교회다’”

무슨 일이든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막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평신도 신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첫째, 평신도 자신이 깨어나야 한다. 신약성경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먹혀들어가고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던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평신도의 위치와 소명을 찾아야 한다. 또, 그 소명을 위해 사도신경에서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의 약속을 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후반기 사역은 성전을 떠나서 백성과 사회에 완전히 열린 사역이었듯이, 교회는 사회에 열린 조직적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즉, 교회는 가정, 지역사회, 학교, 각종 사회단체 및 기업들에 열려 있어야 하며, 교회와 평신도는 이들 사회조직과 교회 사이를 연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가해야 한다.

셋째, 이것이 첫째일 수도 있지만, 목사와 신학자들의 사고와 역할이 현재의 사역방법에서 180도 전환해서 목사의 본래의 사명인 성도를 온전케 하여(엡 4:12) 참교회를 세우는 일에만 열중하되, 자기의 양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양으로 양육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넷째, 교회는 교회 본연의 역할인 성경적인 방법, 예로 평신도 자비량 선교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방법이나 교회의 자급(自給), 자치(自治), 자전(自傳) 운동인 삼자(三自) 운동에 의한 선교방법 등에 의한 세계복음화 소명을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대영 칼럼리스트  dycho11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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