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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신학, 가능한가?금지된 땅에도 봄은 오는가 5
조대영 칼럼리스트 | 승인2016.03.16 14:27

교회에서 평신도의 정체성과 실제적인 위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평신도 신학을 현 시대에 실현한다는 것은, 현재 있는 교회론을 재검토하는 것을 의미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교회론을 전제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평신도 신학이 꼭 필요하다고 하자. 그런데 신학자나 목사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평신도는 제외시키고 자기들끼리 왜곡된 평신도 신학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콩갈 신부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평신도 신학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전체적인 교회론이 있을 뿐이다”고 말함으로써 평신도 신학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도 아직 드문 형편이다.

그나마 가톨릭 신부가 평신도 신학을 거론한 것은 그래도 목사보다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성경적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며 교단정치도 오히려 외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많은 평신도들이 깨어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부정적인 생각이지만, 현존하는 목사 중심의 교회론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가 없다면, 평신도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잠간 나타나났다가 없어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일 뿐이다. 故옥한흠 목사가 평신도 위주의 교회론을 역설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들었지만 그 실천이 미약하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한다.

평신도 신학을 준비하는 것은 거칠고 험난한 길이다. 교회 본질을 찾으려는 이러한 일은 외로운 자기 이해의 길을 걸어야 하며, 대개는 혁명적인 성경연구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아야 한다. 또 이것은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어서 개척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실로 하나의 위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사회가 사상, 원리, 태도, 제도 등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개혁한다는 것은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관성과 역기능을 가지고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 힘이야말로 교회의 지도자와 평신도들 속에서 그 혁신을 방해하는 고정관념화 된 무서운 힘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참된 위치와 의미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성령 안에서 추진력을 얻을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한없는 보고(寶庫)를 타산지석처럼 바라만 보고 있는 실정이지만, 교회는 변화되고 있으며 평신도가 상당한 수준에서 달라지고 있음은 미래의 희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꺼져버린 불씨 가운데서 한 가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같은 공동체적 인식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공동체, 곧 신앙공동체 또는 성령공동체라는 개념을 먼저 확립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신앙공동체는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제도적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신앙공동체가 앞선다는 것은 신앙공동체가 존재해야만 제도적인 교회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제도적인 교회가 신앙공동체에 앞서 존재하는 것 같이 되어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인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구약의 제사장 제도를 본떠 사제성(司祭性)을 전제로 한 제도적 교회를 존재론적으로 평신도가 주체인 신앙공동체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무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잔재가 남아 있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생명 없는 고목으로 비유하는 학자도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평신도가 교역자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현재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교회에 주어진 사명의 완수가 평신도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크래머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조직의 재검토를 거부한다면 평신도 신학이 주축을 이루는 교회의 근본적인 갱신은 할 수 없고, 갱신이라고 해 봐야 한낱 교회 조직의 어떤 부분적인 수정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기회가 되면 교회론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현재로서는 부정적인 문제 제기밖에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첫째, 교회가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로부터 유래한 안수 받은 교역자에 의한 제도적 교회 조직이 곧 교회가 의존하고 있는 유일한 모체가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직제에 대한 이러한 논의 속에서는 참된 평신도 문제가 제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인제사장직’ 사상을 중요시하고 평신도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했던 종교개혁도 이에 상응하는 확실한 교회론을 창출해내는 데는 실패했다.

현실은 평신도 문제를 소극적으로 다루며, 단지 교회 내부적인 문제로서 상호 협조관계를 위해서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가 교회의 중심이 되어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교회론이 논의된 후에야 비로소 교회 전체의 교직제나 목사직의 의미에 관해서도 공통된 새로운 견해를 이끌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새로운 능력이나 영에 있어서나 교회의 참된 본질과 소명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 실제화 되는 새로운 교회론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앞뒤가 뒤바뀌어 있어서 현 사회적 비난의 물결 속에서도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돌파구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계획에 예정된 미래에 대한 비전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신실한 평신도들이 스스로 깨어나서 새로운 신학으로서의 평신도 신학과 이에 걸맞은 새로운 교회론을 정립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론적인 평신도 중심의 교회론만을 내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와 같이 도전적인 세계정세나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는 신조나 성례전이나 질서를 가진 조직체로서의 교회에다 지나친 ‘강조점’을 두는 것은 또 다른 치명적인 해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조직체는 끊임없는 신앙적 혁신을 통해 교회와 구원과 화목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에 대한 응답으로서 교회에 더욱 중요성을 주려는 길을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교역자나 평신도를 포함한 전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성도 개개인이 항상 새롭게 응답하는 것이며, 신앙고백과 행위에 있어서는 항상 새로운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적 진리에 관한 정적인 교리적 정의의 총화(總和)는 아니지 않는가? 왜냐하면 응답으로서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고백과 행위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경말씀, 신앙의 신조, 성례전, 그리고 감독조직의 제도에 관한 것들인데, 첫째 성경말씀과 둘째 신조에는 교회가 하나 되는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성례전과 감독제(교회의 삼대 조직인 회중교회, 감독교회, 장로교회를 말함)라는 것이 가톨릭에서 유래한 성찬과 교직제 교리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들 문제는 신학적으로 매우 민감한 부분이므로 여기서 논의하기는 어렵고 필자는 여기서 문제 제기만 하려는 것이다.

크래머는 교회에 대한 전체적이고 새로운 교회론에 입각한 평신도 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평신도가 주체를 이루는 교회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생각하고자 한다.

1. 이 세상이라는 차원이 교회에 관한 교리의 시야 속에 충분히 들어올 때이다. 이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세상이 교회의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때에는 이 조건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2. 혁신을 위한 끊임없는 소명이 충분히 고려될 때이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깨어나서 각자 자기의 위치를 찾아갈 수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갱신하려는 의지를 유지할 때에 가능한 것이나 아직은 준비가 안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평신도가 자기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헌신할 준비가 현실적으로 되어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평신도들이 깨어나서 하나님의 소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질 것이다. 故옥한흠 목사님이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쓰시고 제자훈련을 시키신 업적은 크지만 현실화하는 데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3. 교회의 생명과 표현의 방향이 교회의 존재와 소명에 의하여 결정되며,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신앙의 모험이 충분히 인식될 때이다. 이것은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을 제대로 받은 성도들은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문제의 인식과 실제적인 헌신이다.


조대영 칼럼리스트  dycho11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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