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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혁명과 나의 일생
황의각 교수 | 승인2016.03.07 13:33

세월이 빠른 것인가? 어느덧 4.19 의거 56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내가 고려대학교 학부를 졸업한지 53년이 지났고, 그리고 모교 경제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지도 11년이 되었다.

나는 당시 고려대 법정대학의 정치외교학과와 문과대학의 경제학과를 떼어내어 1959년 단과대학으로 새로 발족한 정경대학 제1기생으로 입학한 후, 1960년 4월, 경제학과의 2학년 재학생으로서, 백광하(白光河)선생께서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칼럼, 단상단하(壇上壇下)를 매일 읽으며 경제보다 정치에 깊은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고민하던 가난한 시골출신 촌놈이었다.

1960년 4월, 철쭉이 피기 시작할 무렵, 봄학기 제2주째 강의가 시작되려할 때였다.

▲자유당 장권의 몰락을 가져 온 부정선거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었다.

4.18 아침 첫 강의를 기다리며 강의실에 모여 있는데,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몸집이 큰 정치학과 4학년 이세기 선배가 수동 확성기를 손에 들고 강의실 옆을 지나며 모두 운동장으로 집결하라며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자리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이미 1300여명 정도의 학생들이 교문 앞에 모여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전진할 태세를 갖추는 중이었다. 나도 그 대열의 꼬리부분에 합류했다.

4월 혁명 역사의 불씨는 과거 12년 동안 정권을 장악해온 자유당이,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2월 28일 일요일 대구 선거강연에 학생들의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고등학교 일요수업을 강행하도록 정부에 지시한 조치였다. 투표당일이었던 3월 15일 오후, 마산에서 유혈데모가 발생하여 10여명이 피살되고 40여명이 중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날 늦게 민주당에서는 3.15선거 무효선언을 하고 나왔다.

그 후 4월 12일 제1마산사건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김주열(金朱烈)씨의 참혹한 시신이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국적으로 학생동요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3.15부정 선거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씨를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만들어 놓은 투표함 바꿔치기 부정에 대한 항의와 불의에 저항하는 울분은 마침내 4월 18일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인 고려대학교에서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그 다음 날 4.19와 그 후 연속적으로 전국 대학생 데모로 확산되어 퍼져나갔다.

4.18 아침,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와 불의에 저항하면서도 침묵당하고 탄압받아오던 국민의 울분 폭발에 선참(先參)한 순수한 고려대학생들의 의거는 신설동 로터리에서 일차 경찰 제지를 당하며 흩어져서, 일부는 대광고등학교 방향으로 나갔고, 일부는 뒷길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청 앞의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했다. 그곳에는 고대생들과 일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승만, 이기붕의 3.15 부정 선거무효’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하다가, 유진오 총장님과 교수들의 권유로 학교로 돌아오던 우리들은 종로4가 천일백화점(天一百貨店) 앞에서 폭력깡패들의 피습을 받았다. 또다시 흩어져 안암동 교정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늦도록 집결해 있다가 통금시간 전에 흩어졌다.

▲4월 18일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를 행진했다.

4.19 아침 광화문에 운집한 대학생들과 중고교생들의 불의, 부정 그리고 폭정에 대한 저항의 외침은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에 비상계엄령 선포(송요찬 계엄사령관)를 불러왔고, 4월27일 이승만 박사 대통령직 사임, 4월28일 오전 이기붕씨 일가가 자결에 이르는 대정치 격동을 겪었다.

4월 혁명은 한국역사에서 자유혁명의 산 기록임에 틀림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1919년 3.1운동을 비롯하여 광복, 반탁 건국, 반공, 반독재, 민주 통일 운동 등,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긋는 민족 민중 운동의 중심축에는 젊은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순수한 정신에서 궐기한다. 젊은 학생들은 치밀하고 조직적인 정치운동이 아닌 순수한 의분으로 부정, 불의에 저항하며 오로지 나라와 사회의 장래를 우려하는 순수한 정신에서 일어선 투쟁이라고 보아야 한다.

1960년 4.19 이후, 나는 정치에 관심을 두고 당시 생각을 나누고 토론을 해오던 고대의 선후배들이나 서울대, 연세대 등의 동년배 학생들과 자주 만나, 우리가 역사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하고 의견을 나누며 많은 밤들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교회 목사님들, 교수, 정치 분야의 mentor(지도자)가 될 만한 분들을 만나고,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화. 경제 발전, 남북통일문제 등에 대해 좌담회나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수년전 미국 Boston에서 교통사고로 작고한 박상원(朴尙源, 고대 경제학과 나의 1년 선배), 그리고 나와 동기생이었던 정치학과의 손진영, 한춘기(모두 작고)씨와는 전국대학생 공명선거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장면(張勉) 과도정부 및 후속정권하에서의 국민선거공정성 확보방안 등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기도 하고, 또 한국의 학생운동방향을 일본의 전학련(全學聯) 학생운동사례를 분석하면서 연구해보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당시, 박상원 학형과는 답십리의 이웃에서 살면서, 저녁에는 그의 집에서 그 모친께서 마련해주셨던 목포산 홍어회로 밤참을 먹어가면서 둘이 이불을 덮어쓰고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며 미래 정치적 야망과 꿈을 그려본 적이 많았다.

한편, 1960년 여름,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으로 4.19 서울대생의 앞장을 섰던 조홍래(趙洪來; 후에 김영삼 대통령 정무수석 역임 및 경남 함안 국회의원 역임) 등과 전국대학생조국통일추진회를 결성하여, 서울 일일신문 주최로 여운홍, 강원용, 유림, 민병기, 이관구(서울日日新聞(폐간) 사장)씨 등과 공동좌담회를 개최(1960. 9.25, 9.27, 9.28, 9.29, 9.30에 총 5회에 걸쳐 연재 보도: 별첨 참조)하여 사회적으로 민족통일방향모색에 큰 관심을 불러오기도 했다.

나는 그 이후 점차 정치적 관심이나 학생운동에 관심을 계속 두기보다는 학업에 관심을 두기로 결심했었다. 대학 3학년에 진급하면서, 처음 도입된 ROTC 1기(102 학훈단; 단장 김유복 대령, 후에 장군으로 승진) 모집에 응시하여 대학 3학년과 4학년 2년 동안 군사훈련을 겸하여 받았다. 당시 방학 때 고향인 경북 선산(善山)군의 우리 집으로 신원조회를 나온 형사가 ‘고려대학교’는 빼고 정경대학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가르치는 학교냐고 물어 와서 내가 당혹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정경대학(政經大學)은 고려대학교에만 영국 학제를 따라 1959년 처음 생겼던 단과대학이었다.

1963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병과: 병참, 주특기=통역)로 임관하여 1963~64년 통역장교로 육군 제26사단 병참부에서 미1군단(USArmy 1 Corps: 당시 의정부 소재) 작전참모부로 파견 근무했다. 1964년 1월 미국 연방정부 법무장관 (Attorney General)이던 Robert F. Kennedy 부부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정래혁 1군단장을 수행하여 전방 안내하는 통역을 맡은 적이 있어 당시 영화관에서 대한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폭력배들의 의한 고려대생 피습사건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년 후, 전후방교대로 1964~65년 대구 주둔 KMAC-G(미군사고문단 G)에 근무하다가 1965년 3월 말 소위로 제대하였다.

1965년 5월 경제과학심의회 3급 을(乙: 사무관) 특채시험에 합격하여 약 2년 근무하다가 사직하고, 잠시, 전북 이리(裡里)소재 원광대학과 1969년부터는 US-AID 농업국(RDD=Rural Development Division)에서 일하다가, 1972년 US-AID에서 마련해준 비행기표와 TA(Teaching Assistantship) 받아서 주머니에 단돈 50불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00이었으니까 50불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의 반년치인 셈이다.

1976년 여름 University of Oregon에서 학위를 마치고, 서강대학교, 시카고대학교, 영남대학교를 거쳐 1981년 3월 모교 고려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2005년 8월 말, 만 65세 정년퇴임하기까지 학자로서 평생을 보낸 것을 사행(私幸)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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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지나온 세월이 바로 자신의 삶이었으며,
이제 그 삶을 받아들이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 스베틀라나 알랙시에비치‘ 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황의각 교수  euigakhw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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