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초인종'이 1월 28일부터 31일까지 동숭아크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됐다.

"짙은 안개에 눈이 먼 이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띵동, 띵동"

[미디어세상=양은미 기자] 지난 28일부터 나흘간 연극 ‘초인종’이 동숭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2015년 ‘ARC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AYAF 5기 연극분야에 선정된 설유진의 첫 연출작으로 관심을 모은 ‘초인종’은 1979년 발표된 김광규 시인의 시 ‘안개의 나라’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연극은 친구의 죽음으로 9년 만에 집에 돌아온 딸이 초인종을 누르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가 너무 작아 아무도 듣질 못하고, 반복해서 누르다 지쳐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자 그때서야 반응한다.

▲연극 '초인종'의 무대는 의자 다섯개와 책상 두개, 그리고 감정과 관계를 표현하는 오브제 '풍선'으로 꾸며져 있다.

9년 간의 딸의 부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기억에 무뎌진 엄마와 충격으로 인한 치매로 기억을 잃은 아빠는 안개가 가득 껴 있는 외부와 단절된 채 시간이 멈춘 집에서 산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오래 묵은 체증에 답답한 듯 가슴을 연신 두드리고 그를 통해 관객들은 가족 사이의 갈등이 꽤나 오래됐음을 감지한다. 어려부터 아버지의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온 딸, 그 사이 갈등이 천천히 전개되고 곧 그녀가 겪은 고통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반복해서 대사로 등장한 김광규 시인의 ‘안개의 나라’ 구절이 메아리친다.

연극 '초인종' (사진제공=극단907)

“언제나 안개가 짙은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후략>”

그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권력이라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짓밟히고 만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딸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만나게 해 준 유명 작가에게 성폭행 당한다. 어린시절, 자신의 빨간 금붕어가 아버지가 사다 넣은 열대어에 죽어버린 기억처럼 그녀는 그렇게 상처를 입었고 두 부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빠져버렸다.

그 날 이후 가족들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족들은 상처받은 그녀에게 “잊으면 잊혀진다”는 말을 던지며 애써 안개 속으로 사건을 구겨 넣는다. 하지만 그녀는 유명 작가가 사는 큰 저택으로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린다. 저택 안에서는 작가가 키우는 도베르만이 사납게 짖어댔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말한다. “왜 아무도 안 나오는 거야”

극에서 초인종은 ‘세상을 향해 울리는 외침’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극 초반 초인종 소리가 작게 들리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그녀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는 그 날 그녀의 청춘처럼 그에게 밟히고 무시돼 그렇게 지나가 버렸고 그녀의 마음 속에는 분노와 좌절이 뭉쳐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연극 '초인종' (사진제공=극단907)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이제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나선다. 한밤 중 그는 딸에게 “아버지는 다 기억한다. 미안하다. 아버지가 다 고칠게”라며 사과한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버릇처럼 ‘고치면 된다’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암시한다.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세 식구는 뉴스에서 유명 작가의 피살 소식을 듣는다. 딸은 물 한 컵을 쉬지 않고 들이킨 뒤 “시원하다”라고 소리친다. 답답한 속이 뻥 뚫린 듯한 해소를 대사를 통해 표현해내고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극의 마지막 가족들은 고장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던 초인종을 고쳤고 모처럼 마주 않아 대화를 이어갔다. 그 중 딸에게 귀를 찢을 듯한 큰 소리의 초인종 소리가 되돌아온다. 피해자로만 머물러 있었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면서 갈등이 해소되는 듯했지만 또 다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녀는 귀를 막는다.

그리고 관객들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 행위가 이들을 안개 속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